일상속으로

[스크랩] [경북 경주] 삼성씨 시조묘(기계유씨,파평윤씨,창녕조씨)

이름모를 들꽃 2015. 7. 5. 16:32

 

회재 이언적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포항.경주 지역에 있는 기계유씨(杞溪兪氏), 파평윤씨(坡평尹氏),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삼성씨 시조 묘소를 답사하다

 

[기계유씨]-포항시 기계면 미현리

시조는 신라때 아찬(阿飡)을 지낸 유삼재(兪三宰)이다.그의 후손인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멸망한 뒤 고려에 불복하자 태조가 기계현의 호장(戶長)으로 삼았으며 그의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육신중의 한사람으로 알려진 유응부(兪應孚)장군이다. 

 

부운재(富雲齋)-기계유씨 시조묘소 보호를 위한 재사(齋舍)이다

기계유씨 시조 유삼재(兪三宰) 묘소 

묘비석-신라좌아찬유공지묘(新羅左阿兪公之墓)

신도비

묘소에서 바라보는 전경

 

[파평윤씨]-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시조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워 고려 개국공신에 책록된 윤신달(尹莘達)이다.

윤신달과 관련해서는 파평 용연(龍淵)에 있던 옥함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다.

윤신달의 5세손인 윤관 장군은 고려 문종때에 문과에 급제한 1107년 예종때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북진정책을 완수하고 영팽백(파평백)에 봉해지므로 후손들이 파평을 본관으로 하였다.

윤관장군이 함흥에서 전투중에 거란의 포위망을 뚫고 탈줄할때 잉어의 도움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어 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시조묘소 안내문)

이곳은 파평윤씨의 시조이신 윤신달의공의 묘소와 사우를 모신 성역이다. 예부터 전해오는 종중 문헌에 의하면 서기 893년 음력 8월 15일 지금의 파주군 파주면 파평산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 못에 옥함 하나가 떠 있는것을 근처에 살던 한 노파가 발견하고 건져 열어 보았더니 오색찬연한 깃털에 쌓인 한 옥동자가 들어 있거늘, 자세히 보니 두 어깨에는 일월 모양의 붉은 사마귀가 나 있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돋아 있었으며, 발바닥에는 북두칠성 형상의 일곱 개로 된 점이 있었고,또한 손금의 형상이 흡사 尹자와 같았으므로 성을 윤씨로 정하였는데 이가 장성하여 바로 윤신달공이 되었다 한다. 공은 어려서 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고, 장성하여서는 왕건의 막료가 되어 고려국의 건국및 국기 다지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공은 처음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을 도와 서기 918년에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국을 창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계속해서 후백제의 견훤을 복속시키는 데도, 신라를 공격하여 경순왕을 귀순시키는 데도 공이 있으며, 나아가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벌하여 후삼국을 통합하는 데도 공이 多大하였으므로 삼국통일 후에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서훈과 삼중대광(三重大匡)및 태사(太師)의 관직이 니렸다. 그뒤 서기 943년에 왕건이 승하하고 2대 혜종이 즉위하였는데 혜종은 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즉위한 익년에 공을 신라 유민을 다스리는 경주대도독으로 보낸는 한편, 공의 아들 공신공(휘 선지)을 인질로 하여 서경에서 봉직케 하였으므로 본의하니게 혈육 별리의 고통을 겪게 되었으니 때의 춘추 52세 였다. 공은 항상 태조 왕건에게 백성을 석가같이 사랑하는 왕도정치를 베풀도록 충간하였으며, 스스로는 신라 유민을 다스릴 때에 항상 인과 덕으로 대하였으므로 30년간의 통치기간중 단 한번의 반란도 없었다 하니, 이 점이 바로 혜종이 공을 두려워 한 까닭인 동시에 공이 이역 땅 경주에서 생을 끝마치게 된 동기이기도 하였다. 공은 이와 같이 선정을 베풀다가 서기 973년 81세 되던해에 결국 임지에서 일생을 마쳤으니, 신라 유민은 공의 유덕을 흠모하여 여기 금닭이 알을 품은 형상(금계포란지형)의 명당 자리에 예장하였다. 그러나, 이 묘소는 세구연심토록후손이 천리 원거리에 있었으므로 어느덧 그만 실전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기화로 하여 이 지방의 토호 이하지(李厦榰)가 전래하던 묘비를 동강내어 땅속에 파묻고 투장을 감행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영조 연간에 이르러 경주 종인 참봉 도(燾)가 전래하는 야설에 의하여 이를 탐지하고 요로에 알렸더니 당시 종약장인 영부사(뒤에 우의정) 지완(趾完)과, 판부사(뒤에 좌의정) 지선(趾善)과, 판서 헌주(憲柱)와, 선지 봉조(鳳朝)와, 영장 봉정(鳳廷)과, 경주부윤 이(理)등이 힘을모아 심묘에 진력하였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다가 영조13년(1737년) 익헌공 양래(陽來)가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7일간에 전 묘역을 샅샅이 파헤쳐 본 결과 드디어 묘비 동강을 발견 하므로써 확증을 얻어 비로소 심묘(尋墓)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봉분을 개축하고 석물을 다시 다듬어 세웠다. 그 뒤 안동부사(뒤에 지돈녕) 광소(光紹)가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하여 재실을 창건하고 제기 등도 갖추었으며, 한편 재실에는 봉서암(鳳棲庵)이란 현판을 붙이고 승려를 상주시켜 묘역을 수호케 하다가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봉강재(鳳岡齋)입구 홍살문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尹莘達)묘소

묘비석-고려태사윤공신달지묘(高麗太師尹公莘達之墓)

묘소앞의 석물들

문인석

묘소에서 내려보는 봉강재

묘소에서 보는 전경

봉강묘-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봉서암과 봉강재

봉강재 현판

 

[창녕조씨]-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창녕조씨의 시조되시는 조계룡의 어머니휘 예향(禮香)은 신라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따님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질병이 있어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던 차에 주위 사람들이 창녕 화왕산 기슭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개하고 기도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개하고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운무가 일고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몽롱한 지경에 정신을 잃었다가, 얼마후 운무가 걷히면서 못 한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는데 그로부터 질병은 완쾌되고 태기가 있었다 한다.

그 뒤 아들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曺"字와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하루는 꿈에 장부가 나타나서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는가? 나는 동해신룡의 아들 옥결(玉抉)인데 이 아이의 아비다. 이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 사실을 이광옥이 진평왕에게 아뢰었는데 왕이 이 아이를 접견하고 보니 풍모가 특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曺"자의 글무늬가 있음을 보고 성을 "曺"라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지어 주었다 한다. 그로부터 성장하여 진평왕의 부마가 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하니 곧 창녕조씨의 시조 이시다.(창녕조씨대종회안내문 참조)

 

창녕조씨시조 조계룡 묘소

 

창녕조씨 시조 묘비-창녕조씨시조신라태사부마도위창성부원군묘단비

(昌寧曺씨始祖新羅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君墓壇碑)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

'일상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연산  (0) 2015.10.14
삼태사  (0) 2015.07.05
[스크랩] 삼태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시간여행  (0) 2015.07.05
주왕산  (0) 2015.03.24
아들과 노래방에서  (0) 2015.03.24